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몇 달간 바쁘다는 이유로. 참 많이도 멋대로 지냈다. 마음이 탁해지는 순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장 빠르게, 손쉽게,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법으로 어김없이 술을 택했다. 지난 몇 년간 술을 간헐적으로 끊어도 보고 끊임없이 마셔도 봤다.
술이라는 게 그냥 매일 마시더라고 해도 적당히 내가 좋으면 그걸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 술이 참 좋지만, 매일 술을 마시는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문제다. 어디 가서 실수를 하고 안 하고 하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행위에서 오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패배감이 문제라는 것이다.
무언가에 집중하며 강박을 가지는 것만큼, 내려놓기와 멀어지는 행위가 있을까. '끊는다.'라는 것에 집중하면서 누르는 욕구가 얼마나 큰 역치를 만드는지 잘 알지만, 0아니면 100밖에 없는 사람처럼, 그 정도 마음 비슷하게 먹어야 줄일 수라도 있지 않겠나 싶어 한 달간 아니 우선 보름간 금주 같은 것을 해보려 한다.
깨끗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뒷산을 오를 것이다. 몸이 좋지 않거나 뭐 PMS라든지 너무 바쁠 땐 요가나 스트레칭, 명상을 한다.
이번 메일은 이렇게 욕구를 다스리는 중 주변을 채운 사진, 상황, 일어난 감정 등을 담아보려 한다.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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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화요일. 나뭇잎 줍기가 언제나 성공으로 돌아가진 않는다. 참 예뻤는데 이 친구는 두 번째 실패. 아무래도 생생한 초록일 때가 아니면 가지가 잎을 물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
이사하고 처음으로 밥솥을 돌렸다.
바쁜 와중 어머니가 꼭 밥솥은 이삿날 먼저 가져다 놓으라고 신신당부하셨어서, 나보다도 더 먼저 이 집에 들어온 밥솥이다.
웬수 같은 오빠가 사준 쿠쿠 밥솥.
잘 사나? 애는 잘 크나?
잘 작동한다.
양배추 익쌈에 참치 쌈장을 재빨리 만들어 한 끼 뚝딱했다. 양배추 조금만 더 익었으면 좋았을걸.. 밥솥에서 밥을 푸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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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수-목요일.
하루를 이틀 사흘 나흘 같은 에너지로 보내는 박주애 다녀감. |
올여름 제주에 머무는 동안, 주애는 헤어질 때마다 “다닐 때 뱀 조심하고.”라고 말했다. 유월의 뱀은 독하다며, 겨울잠에서 깨어난 애들이 허기져있다고 했다. 누가 진심으로 뱀 걱정을 해주는 게, 다정하고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도 “윤주, 제주도 햇빛을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모자는 꼭 써야 해”라고 내가 새카맣게 타는 것을 걱정해주거나. 그렇게 걸어다니다가는 집에 가면 슬리퍼는 다 끊어지고 없을 거라며 걱정해주곤 했다.
자연스러움도 스타일이 되어버리는 요즘 시대에, 나는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좋다. 그래서 주애가 귀하고 예쁘다.
그녀의 투박함과 남을 웃게 하고자 하는 욕심에 가려진 진중함과 섬세함, 뜨신 마음, 따뜻한 마음 아니고 뜨신 마음을. 세상이 알아야 하는데.
주애 그렇게 미치지 않은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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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주애가 친구네 농장에서 보내준 골드 키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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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금요일.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술잔을 기울이지 않은 생경한 밤을 보냈다.
드디어. 아침부터 술 생각이 난다. 일주일에 일곱 번을 마시는 내가 나흘이나 큰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신기하다.
시월 간 마음속 워밍업을 잘 다져서 그런 걸까.
말일에 나눈 통화 때문일까. 일이 막힐 때마다 한잔하고 싶다... 떠올렸다.
칭따오 논알콜 맥주 한 박스 사두길 잘했다. |
저녁과 칭따오 논알콜 맥주를 마셨다.
와... 이렇게나 잘 만든다고?
요즘 논알콜은 정말 잘 뽑아내는구나. 맛에서 크게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뭔가 욕구가 조금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한데...하고 생각될 때 아무리 마셔도 맑은 정신.
아쉽다.. 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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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주운 나뭇가지와 함께 전달하는
논알콜 맥주 활용팁. |
술을 섞어 먹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들어보셨으리라.. 각각의 알콜 화학성분이 섞이는 것이, 한 종류의 술을 마시는 것보다 헤롭다는 것은 알지만.. 소맥이나 양맥이나 고맥이나 뭐 이런 것들을 꼭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단 말이다. 그런 음식이, 그런 기분이 있단 말이다. 그럴 때, 바로 맛 좋은 논알콜 맥주를 활용하는 거다. 맛만 백분 활용하고 알콜 화학성분의 혼합은 피해 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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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 토요일.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영화 '아가씨' 作中 대사)
장건율. |
욕구를 잘 다스린 밤을 지났다.
한 달에 한 번 컨디션이 떨어지는,
아니지 엄연히 말하면 한 달에 일주일,
아니지 보통 시작하기 일주일 이전부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니 한 달에서 절반의 감정이 호르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무려 이십 년이나 되어간다는 게 어이가 없다. 오늘은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서, 산을 오르지도 못하고 가벼운 스트레칭만 짧게 해주었다.
사실 지난 나흘간 산에서 같은 사람을 같은 시간에 우연히 만났는데, 오늘도 그 사람은 산에 올랐을까. 그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뤄두고, 저녁에 일 마칠 무렵 건율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이유 없이 만난 것이 오랜만이었다. 서로가 많이 바쁘다 보니 매번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때, 아니면 다른 일들을 끼고 만나왔는데, 오늘은 어떻게 딱 시간이 맞춰져서 퇴근 무렵 건율이가 회관으로 왔다.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상황들 때문이었던지, 건율이가 꼭 밥을 사겠다고 근처에 궁금했던 식당에 가보자는 것이다. 그 식당은 사실 식당이라기보다 선술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숙성회와 제철 해산물 요리를 파는 곳이다.
"너 술 안 하잖아." 하니까
"나 오늘 술 마실 수 있는데." 하길래
"나는 못 마시는데. 그래도 뭐 가보자."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대 마시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음식을 고르고, 거기에 보태어 건율이가 사케를 사준다고 꼬시는 거다. 진짜 이러기냐고 물으니, 아니 누나 원래 끊는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날짜를 늘려가야 한다는 둥, 뭐 끊기 전에 좋은 것은 한 번 먹어야 한다는 둥 하는데.
이렇게 서로 바쁜 사이. 어렵게 시간 맞춰 만난 장건율인데? 술 안 마시는 장건율인데? 사켄데? 제철 해산물인데? 고노와다인데? 겨울인데??
그렇게 나는 무너졌고 우리는 맛있게 먹고 마셨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근래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화가 나고 기쁘고 부담되고 답답하고 기대하고 설레는 이야기들을 어김없이 긴긴 시간 떠들다, 부쩍 추워진 밤 움츠러든 어깨로 걷고 걸어 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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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일요일.
안녕하세요.
의지박약 정윤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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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천근만근.
어우 너무 일하러 나가기가 싫다.
오늘은 어떻게 집에서 최대한 피드백해 보면서
비벼봐야겠다.
밝은색 빨래가 동산을 이루었다.
통돌이 세탁기 가득 빨래를 돌리고, 간만에 바깥에 건조대를 펼쳐볼까.
볕이 어찌나 좋던지.
어젯밤만 해도 오들오들 떨었었는데 말이지.
빨래를 널다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읽던 시집을 가져와서 팔랑거리다 딱 떨어지게 좋았던 시를 옮겨 적어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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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일하기에 무사히 성공하던 중.
저녁을 간단하게 해 먹을까 하면서,
집 근처 작은 마트에 들렀다.
(아, 오늘은 아무런 육체 수련을 하지 못했다.)
홍합살이 저렴하군. 이걸로 파스타나 해 먹을까 하고서, 마늘이랑 홍합살을 사다가 집에 가는데 아니 기분도 너무 좋고, 홍합살인데,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인데? 날씨가 변했는데?? 나 녀석 요즘 열심히 살았는데.. 와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와인 정도는.. 편의점에서 결국 한 병을 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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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월요일.
그날의 시작.
센텀에 일보러 가는 길.
좋아하는 수영 강변을 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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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쩐지 끌리는 사람과 어쩐지 끌리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세상은 대장 내시경을 해 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말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대장 내시경 간단해졌다며..?
이끼를 좋아하는 주영씨가 연락을 주었던 것이 아마도 제주도 오일장 사진을 보고서였던가. 당시에는 이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이름도 알지 못해서 조금은 마음속으로 경계 했던 기억이 난다.
짧은 이야기만 나눠봐도 호와 불호를 빠르게 느낄 수 있다. (마냥 장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를 아무리 좋게 생각해줘도 내가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야 한다.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무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다글다글 끓는다.
피에타의 마리아처럼,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품 속에 아이처럼 사랑하고 싶다. 사랑하게 되면 "어유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 하면서 남녀노소(?) 쓰다듬게 된다. 물론 가까운 사람 한정..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잠깐 흘렀는데, 주영씨는 어쩐지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왜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고 그냥 그랬다. 우리는 간헐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여기서 이 간헐적인 빈도와 느슨함이 좋았다. 우리가 각자의 템포로 서로 따로 또 같이하는 것 같아 반가웠다. 어쩐지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밴드에 초대해주어 일상에서 나에게 주는 선물을 100일간 기록하는 챌린지를 하고 있다. 어제는 누군가가 붕어빵을 먹은 것을 보고, 평소 벼르던 붕어빵집에 갔다. 맨날 너무 아침 일찍 출근하다보니 늘 닫혀있었는데, 오늘은 이 붕어빵 때문에 오전 업무시간을 설계했다고 할 수 있다. 뭔가 느낌이 오는 붕어빵집이어서 꼭 저기서 먹어야지 했는데, 얇은 피에 담긴 따끈한 팥이 정말 제대로였다. 같이 일하는 준이도 좋아해 줘서 무척이나 기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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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를 좋아하는 편. 좋아하는 것을 맨 마지막에 먹는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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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왼쪽 눈썹 앞머리에서 2 cm정도 올라간 지점의 통증을 달고 다녔다. 어찌나 괴롭던지.
<연애의 목적>
지금의 시대성에는 맞지 않는 영화일 수 있다. 당시에도 마냥 편한 영화는 아니었으니까..
얼마 전 <사랑을 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유튜브로 결제해서 봤었는데, 말 그대로 사랑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리는 꽤나 동물적이고 추하다. (우선 나는 그렇다..)
가타부타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면 끝도 없고 여기서 '홍' 강혜정 역이 가진 불면이 종종 떠오른다.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어머니의 단골 멘트를 빌리겠다.) 갓난아기일 때부터 나는 몇십분도 연달아 잠들지 못했고, 어머니는 골룸처럼 머리가 다 빠지셨으며, 내가 첫째였다면 둘째는 없을 거라더라. 어쨌거나 되돌아보면 한평생 푹 자본 기억이 없다. 한 번이 없다.
불안이나 예민도가 높아서인지. 연초에 한의원에 갔을 때 맥박이 너무 각성 상태여서 그래프가 위로 올라 붙어있다나 뭐라나.. 커피도 끊으라고 하시던데..
잘 잠들지 못하고 잠귀가 밝은 것이 때때로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상황들을 만들기도 하더라.
<연애의 목적>에서 '홍'은 오래 만난 남자친구랑 있을 때 언제나 잠을 설치고, '유림'이었나 박해일과 함께 있을 때는 잘 자다 못해 차에서도 졸았던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에게도 함께 있을 때 졸린 사람이 있었다. 우린 4년을 함께했고, 헤어진 이후에도 그 사람은 내가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우스워했다. (믿지 않았다.) 언제나 그 옆에서는 졸고 말았으니 그럴 법도한데 나는 그 사람이 끝까지 내 불면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참- 맞다. 너 불면증이지.(하하)" 하면서..
이상하게 그게 뭐 누워서 뿐만 아니라 같이 차를 타든, 조금이나마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든, 그 사람과 있을 때면 지난 인생에 잠을 보충하듯 졸린 거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니, 이거 지금 멀미하는 거다." "내가 얼마나 못 자는데!"하면서 억울해했었는데.
확실한 것은 그 이후 나는 나를 잠재우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같이 있을 때 졸린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졸린다는 이유로 사랑할 판이다.
오..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냐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우물쭈물했는데, 이걸로 정리가 되네. "같이 있으면 졸린 사람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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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는 안되나 봐요. 글렀어요..
그.. 저.. 한우를 선물 받기도 했고, 아니 세상에 술 마실 이유가 너무 많은데. 하.. 또 오늘은 개인전 디피였고요. ㅋㅋ 그냥 마셨습니다.
이게 술을 안 마시니까, 일단 사람이 조금 더 잡디다.
정말 조금이나마 더 자고, 속쓰림이나 인후통이 좀 줄었고요. 위산이 적절하게 분비되는 듯합니다.
뭔가 사람이 깨끗하고, 일단 일생에 절대 실수를 안 할 것 같은 기분이더군요.
낮에는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안 마시는 삶은 이런 거구나-" 말하며 아련하게 허공을 응시했지요.
술을 마시지 않는 밤이 처음에는 더 길고 괴롭기 때문에, 사람이 커피도 디카페인을 마시게 되더라고요.
디카페인 커피에 무알콜 맥주.
그래 참 세상 기술이 너무 좋아져서 다 맛있고 멋져. 다 좋은데. 왜 내가 가짜 삶을 사는 것 같을까요.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것은 압니다.. 하하..
생각해보면 저는 술자리보다는 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정말 많아도 사람 셋이 넘어가면 이게 행사같고 (가끔은 좋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혼자 마시기고요.
갑자기 생각나서 하는 말이지만, '혼술', '혼밥' 이런 단어가 생겨날 때 솔직히 좀 짜증이 났답니다. 일상을 혼자 하는 게 기본값인데, 둘이 먹거나 셋이 먹을 때 '두밥', '세밥'하진 않잖아요?
어쨌거나.. 그 혼술을 하다가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술잔에 주거니 받거니 하면, 또 그 기쁨이란.. 따라주고 받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몇 번은 그렇게 하고싶어요. 그게 너무 또 맛있단 말이죠..
사실 주변에 술을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꼭 같이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저만 마시게 해주면 되는 타입입니다. 뭐 모로 가도 마신다는 결론인데요.
내일부터는 또다시 맑게 살아보려고요.. 이쯤 되니 맨 위에 비장한 저 문구들을 고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냥 써봅니다. 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부디 저의 정제된 삶을 응원해주세요. 아니 어떤 삶이라도.. 응원해주세요.. 그리고 저 안취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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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금요일.
매일 걷는 배산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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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상
아침 7시에 일어나 이불 속에서 꿈틀거린다. 요즘 너무 추워서 이불 바깥으로 발가락 꺼내는 게 쉽지 않다. 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면서 두툼한 이불을 끌어안고 좌우로 조금 굴러주다가 앉으면 7시 15분쯤. 양치하고 유산균을 챙겨 먹고, 씻지 않은 얼굴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뒤 대충 빨래 게이지를 다 채워가는 옷을 몇 개 입고 등산화를 신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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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차 경사 : 영주암
부피가 크고 두꺼운 옷이 정말 싫다. 시작은 언제나 춥게. 배산의 입구까지 오르는 길이 이미 가파른 경사기 때문에, 나오자마자 오르막을 오른다. 조금 오르다 보면 영주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언제나 귀엽다. 주변에 심겨진 나무의 수종이 다양하게 잘 가꾸어져 있어, 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답다. 이 시간은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따사로운 노란빛을 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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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차 경사 : 배산의 시작 버섯 모기 존
여름이면 이곳에 모기떼가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다. 산불 방지를 위해 물을 곳곳에 담아둬서 그런지, 하루살이 같이 보여도 다 모기다. 습격을 조심해야 한다. 가장 빠르게 올라가야 하는 구간인데, 여름 안개가 끼면 무척이나 신비로워서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된다. 모기 존과 맞물리게 버섯 존이 이어진다. 늦여름 하얗고 큰 버섯들이 곳곳에 돋아난다. 꼭 먹어도 될 것 같은 버섯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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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스장과 약수터
버섯 존을 지나면 산스장과 약수터가 나온다. 어르신들이 모여서 손뼉도 치고, 수다도 떤다. 이모들은 각자 마실 것을 챙겨 오시는데, 텀블러나 물병 아래에 흙이 묻는 게 싫으신지 저마다 다른 모양의 나뭇잎을 깔아두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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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차 경사 : 데크 계단 존
본격적인 오르막을 오른다. 200개가 넘고 300개가 안 되는 개수의 계단이다. 오를 때에는 두 개의 벤치가 있고, 두 번째 벤치는 전망대와 가깝다. 봄을 지날 때, 연두색 잎들이 마구 돋아날 때 이 두 번째 벤치에서 책읽는 것을 좋아한다. 5-6월이 되면 아카시아 향이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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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현아한테 계단 개수를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정확히 100번째 계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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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망대
그렇게 전망대에 다다르면, 전형적인 부산의 마운틴뷰가 보인다. 산을 돌려 깎아 빼곡하게 지은 건물들과 꼬불꼬불한 길. 맑은 날은 왼쪽에 광안대교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실 이 지점에는 잘 머물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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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좋아하는 길
돌이 자글자글 있는 짧은 동선보다 우측으로 완만하게 조금 돌아 오르면, 경미한 경사도를 가진 산길이 이어진다.
여기가 배산에서 제일로 예쁜 구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을 편안하게 즐기며 걷는다. 새소리도 좀 듣고.
찾아보니 여길 걸을 땐 사진 찍을 틈이 없었던지, 마땅한 사진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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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지막 경사 : 정상석
돌로 된 경사 구간을 오르는데, 이때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스틱이 있으면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스틱 없이 갈 때는 나무 같은 것들을 잡으면서 올라가면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
짧고 가파른 경사를 조금 오르면 정상.
좌측에 과장을 조금 보태어 A4용지만 한 깜찍한 정상석이 있고, 우측은 소원을 비는 돌들이 거대하게 쌓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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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은 술잔을 엎어놓은 모습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盃 잔 배/ 밤에는 술을 마시고 아침에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술잔을 엎어놓은 모양의 산을 오른다. 결국에는 또 마셨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괜히 성심성의껏 소개해본다는 이야기다.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고, 때론 침묵이 거짓이 되기도 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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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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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애가 부산에 왔을 때, 밤에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서 부른 배를 탕탕 치며, "윤주, 넌 꿈이뭐야? 나 요즘에 꿈 물어보고 다니잖아-"라고 말한 이후부터 꿈..
꿈에 대해 틈만 나면 생각해보게 된다. 건율이를 만났을 때 "넌 꿈이 뭐야?" 묻기도 했고, 그렇게 거듭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다.
우선 옳은 것을 옳다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앞장서서 농성하진 못하더라도,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다. 때때로 이렇게 당연한 것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할 때도 있겠지만.. 구조 속에서 만난 달콤한 말들만을 좋아하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탐탁치 않아하던 눈빛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쨌거나 부를 이루거나 명예를 높이는 것보다도 진실된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이었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곧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일요일에 갑자기 생긴 짬에 뭘 좀 봐볼까 헤매고 있었는데, 현우 선생님이 엄선한 다큐 세 편을 보내줬다.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 집과 사람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였다. 지금 딱이다 싶어 바로 틀어서 연달아 두 편을 봤는데. 특히나 상단에 사진을 첨부한 부부가 나오는 편이 좋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마냥 좋은 마음과 함께, 저렇게 지어서 살려면 얼마가 있어야 하고 얼마나 벌어야 하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밀어두고 순수하게 좋은 마음에 집중하려 했다. 두 편의 다큐에서 총 세 집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모두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이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움직임이 불편해지고, 편안함을 쫓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어머니만 해도 그렇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더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니.. (사실 그녀는 원래 시티러버..)
각자의 삶을 담은 저마다 다른 집에서,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그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감사를 느낄 줄 알았고, 자연에서 큰 힘을 얻는 듯이 보였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땅의 경사를 절토하거나 성토하지 않고, 축대를 세워 반듯하게 올리지 않은 집이 좋았다. 자연 속에서 최대한 주변을 헤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결에 스며들고자 하는 그들의 삶이 예뻐 보였다.
끊임없이 주변을 돌봐야 하고, 무릎이 조금 아플 수 있겠지만 계절마다 변하는 잎과 나무와 하늘과 물을 보며, 매일 비슷해 보여도 조금씩 다른 오늘을 기록하면서 살고 싶다. 여기서 포인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살고 싶다.
그들 모두 대체로 젊은 시절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때때로 고즈넉하고 소담하게 주어진 것 안에서 흐물떡 거리지 않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조용하게 사는 삶을 바라는 것이, 혼란하고 정신없이 쏟아지듯 사람들을 만나는 삶과 너무 상충한다고 느끼지만, 그런 삶을 바란다.
너무 일찍이 그런 삶을 바라는 것인가 싶다가도, 바라는 것에 빠르고 느린 게 어디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오늘을 더 치열하게 살기도 한다.
먹고 사는 것이야 어떤 일이든, 지금 하는 것이든 아니든 어떻게라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이제 조금은 생겼다. 문제는 사랑인데.. 맨날 사랑 사랑 그놈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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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전화가 와서는 "몰스킨이 1800년대부터 썼을 건데 1997년 생겼다 돼 있던데 잘못된 거 아니가?" 묻길래, 그러고 보니 일단 고흐가 썼다고 하면 그 말이 또 맞는데 뭐지 싶어서 뒤져 봤지요.
놀라운 것은 몰스킨이라는 것이 특정 회사의 상표가 아니었다고 해요. 파리에서 소수의 제작자가 손으로 만든 수첩의 형태를 통칭해서 몰스킨이라고 불렀다더라고요.
여기에는 뭐 원래는 커버에 양가죽을 사용했었는데, 비용상의 문제로 기름먹인 면 재질인 몰스킨 원단을 사용해서 몰스킨이라고 불렀다는 썰이 있기도 하고요. 새삼 몰스킨이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이야기를 잘 붙였나 그런 생각도 들고, 심지어 이탈리아 사람이 만든 브랜드더군요.
몰스킨에 대해 더 궁금하시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해주세요.
위 링크의 상단에 글이 인상적이네요.
그렇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책은 몰스킨 외에 거의 없다. 작고 검은 몰스킨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허세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한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똑같이 생긴 유명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이 독창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허세적 소도구라는 것이다. 작고 검은 몰스킨이나 희고 납작한 맥북 같은 것들.” (문구의 모험, 제임스 에드위드, 2015년)
호호.. 검은 몰스킨과 납작한 맥북을 사용하고 있는데.. 흥미롭습니다.. 저는 예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저 책 재밌겠네요. 아무튼 또 부록이 길었습니다.
길을 걸으면 이제 제법 겨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코와 귀가 볼이 시릴 때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몸마음 건강하시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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