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이 둥근 것은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속 「과일이 둥근 것은」을 읽으며 들었던 잡다한 생각.
책의 본문은 #fd7441 색으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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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 알의 사과를 건네주던 날.
너는 도안을 그리느라 바빴고, 그 옆에서 나는 소리 내 책을 읽었지.
그날 읽었던 수많은 페이지 중에 한정원 작가의 「과일이 둥근 것은」이 있었어.
과일 아저씨, 담배 아저씨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과일. 우정. 둥근 것. 뭐 그런 것 좋겠다 싶어서. 두서없이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적어보려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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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부모의 식생활을 닮기 쉽다. 예를 들자면 나는 삼십 대에 다다를 때까지 돈가스를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돈가스를 먹은 기억이라고 하면 급식이나 누군가 사줘서 먹은 몇 번 정도가 전부였다. 꼬마일 때 함박스테이크, 돈가스 등을 파는 경양식집이 인기 있었던 시절 (파슬리, 마카로니, 후추를 뿌려 먹는 수프 필수) 친구들에게 '아마데우스' 같은 신비로운 어감의 패밀리 레스토랑 외식 썰을 들을 때마다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보니 찾아서 먹지 않게 되었다. 우리 집의 외식 메뉴는 회 아니면 고기였는데, 그마저도 어린 시절 나는 육류를 싫어해서 지금까지도 가족들이 모이면 십중팔구 바다에서 난 것들을 먹으러 간다.
돈가스뿐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오빠는 디저트도 먹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 내가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니가 아직 애가?" 하면서 물었었다. 웃긴 건 그 말을 들은 내가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였고, 아이스크림은 애들만 먹는 음식이 아녔다. 친구네 집에 놀러갔을 때 그 집 부모님이 바 형태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란..
갑자기 식생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모든 식구가 과일을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어서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 때문에 명절이면 과일이 참 많이도 들어왔었는데, 특히나 IMF 전에는 저걸 누가 다 먹나 하는 정도였다. 아무리 나눠주고 나눠주고해도 썩혀서 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어머니가 드시던 과일이 있다면 귤. 여담이지만 나를 가졌을 때 귤이 그렇게 당겨서 하루에 한 소쿠리씩을 먹어 치웠고, 십 개월이 지나 내가 나왔을 때 너무 노랗게 나와서 황달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마 귤 때문인 것 같다고 지금까지 말씀하신다.
역시 과일도 먹어 버릇하지 않다 보니, 크게 관심이 없다가 스물한 살, 일본에 6개월 정도 머물면서 (또 이 시절 생활에 대해 말하자면 너무 길어질 테니 잠시 넣어두고) 그때 입맛이 많이 바뀌게 된다. 일단 돈이 없었기 때문에 짱구 엄마처럼 매주 세일하는 마트 전단을 챙겼다. (일본은 이 전단이 아주 활성화돼있는 것이 신기했다) 매일 매일 장을 봤는데, 저렴한 것을 필요한 만큼 사다 보니 자연스레 제철의 채소를 배웠고, 3개에 99엔 하는 낫또는 냉장고에서 떨어질 일이 없었다. 건강하게 먹다보니 단 게 당기는 순간에 신선한 과일이 먹고 싶어졌는데, 그럴 때면 오늘 특정 마트에서 파는 가장 저렴한 제철 과일을 챙기게 됐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모든 과일이 대체로 한 알씩 판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1인 가구를 위한 구성이 많이 생겨난 편이지만, 몇 개들이로 밖에 팔지 않을 것 같은 과일도 당시 모두 한 알씩 판다는 것이 과일 초보인 나에게 딱 맞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3-4년. 혼자 살면서 참 많은 것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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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과일은 항상 선뜻 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는 좀 더 빠듯하게 생활하던 때라, 슈퍼에서 먹고 싶은 과일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도, 먹지 않아도 되는 과일보다는 없으면 안되는 끼닛거리를 사게 되었다. |
과일은 그렇게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꼭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언제나 조금이나마 더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다 보니 나를 위해 내가 과일을 사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변한 소비 방식이 몸에 배니, 또 자연스레 먹지 않고 살게 되더라.
그러다가도 꼭 과일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데, 늦여름의 무화과를 발견할 때다. 딱 적절하게 익은 것을 만나기가 어려울뿐더러,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안 된다면서 많은 양을 파는 과일이어서 좋아하면서도 선뜻 사 먹지 못한다. 무화과 사랑이 단연 최고로 높고 크지만, 다음으로 여름의 물복숭아, 시원한 수박, 겨울의 딸기가 있다.
과일을 먹을 땐 중세 유럽의 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나 호사스러운 느낌을 배가시켜주는 과일이 좋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 가득 과즙이 퍼지다 못해 가끔 입가나 손목을 타고 흐를 때면, 나는 디오니소스가 된다. (?)
그런 과일. 그런 과일을 당신이 나에게 건넨다는 것은. 계절이 돌아온 순간에 나를 떠올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일까.
나를 위해 꼭 없어도 되는 거라고 미뤄둔 과일을.
당신도 먹을거리 사기 위해 시장에 들렀을 때 눈동자 흰자로 보고서 포기하고 지나치지 않았을까. 그런 과일을 선뜻 건네 주었을 때, 나는 누구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기분이 된다. 그럴 때면 기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보다는 조금 더 깊은 말을 하고 싶은데, 아직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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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봉지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너른 골목에는,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슬레이트 단층집에 사는 아저씨도 그랬다. 단칸방은 창도 작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집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체격이 왜소하고 표정이 굳어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봉지에서 포도 한 송이를 꺼내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더 주어도 괜찮지만 매번 주고 싶은 만큼보다 덜 주는 것이 내식의 배려였다. 아저씨는 한 손으로 포도를 받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입에 문 담배를 빼들었다. 잘 먹을게요. 답은 늘 담백했고 그럴 땐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원플러스원이더라고요, 엄청 싸서요, 내가 변명을 붙이면서 볼 때마다 무엇을 주어도 아저씨는 사양하지 않고 선뜻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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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주어도 괜찮겠지만 매번 주고 싶은 만큼보다 덜 주는 것이 내 식의 배려였다.'
특히나 이 부분이 좋았다. 배려라는 것이 베푸는 사람이 좋은 마음이었다고 해서 응당 좋은 일은 아니니까. 때때로 배려가 슬픔이 되고 부담이 되고 화가 되기도 하니까.
그럴 때면 배려를 받은 사람은 배려받았다는 이유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마주하며, 스스로 나쁘거나 못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배려야말로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었는지, 론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슬픔에 대해, 슬픔이 찾아온 사람에 대해, 슬픈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해 담은 두 책에서 읽었던 부분이 떠오른다.
지금 찾아보니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슬픔의 위안』에 대해 인용한 39-40쪽의 부분이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
이 부분을 떼어놓고 봤을 때 다소 격앙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두 책을 보며 누군가를 위한다는 행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언제나 속 편하게 슬픔을 붙이고 사는 내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마음 쓰이게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을 시작으로, 내가 아닌 가까운 사람에게 거대한 슬픔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을지 떠올려 보았다.
찾아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위로의 말을 건넬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바라만 보지 않을까. 가끔 비틀거릴 때 옆에 기댈 수 있게 묵묵하게 보폭을 맞추지 않을까.
가만 보니 내가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하는 방식이 내가 받고 싶은 위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와 나눈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찾아가서 손가락으로 찌르고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정이고 사랑이지, 그렇게 조용하게 옆에만 있는 것에서 어떤 애정을 느낄 수가 있겠냐고 말씀하셨다. 내 방식이 때때로 관계를 냉소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가 이렇게도 다르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어려운 문제다. 결국 상황마다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이고 내가 받고 싶은 위로는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모호해졌다.
결국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당신이 한 번 포기한 적 있는 대상은, 절대로 포기 못할 대상이 다시는 될 수 없다. 그것을 포기할 때 절대로 포기 못 하겠다는 그 마음까지 포기한 것이므로.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례출판사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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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알의 사과를 건넨 친구와 급격히 친해진 시기가 떠오른다. 2020년 1월이었다.
2019년도 연말까지 반년 정도 새로 열 공간의 공사가 이어졌는데, 대체로 많은 공사가 그렇듯 예산을 초과하여 통장이 아주 개털이었다.
새해가 되면 정말 열심히 일해서 회복해야지 하던 차에 바야흐로 코로나의 시대. 모든 계획된 이벤트들이 중지, 취소되고 잠정적으로 일정들이 미뤄졌다. 전시나 행사와 관련된 디자인이 주 업무, 주 수입이었기에 당시의 타격감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같은 동네에 살던 우리는 함께 하천가를 걸으며 참담한 오늘과 내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당시에는 실내에 들어가는 것도 두려웠기에)
"야 카레하면 계속 먹을 수 있잖아. 어제 마트 갔는데 감자 한 알 얼만 줄 아나? 000원이더라 미친 거 아니가?"
"언니야, 나 뭐 해 먹고 살지. 진짜 입시 미술학원 드가까?"
"뭐라노, 좀 만 참아라. 어떻게든 산다. 일단 회관 나온나." 했었는데.
그날 나는 시장에서 산 여린 상춧잎과 세발나물을 잘 씻어서 그녀에게 주었다. "상추는 쌈 싸 먹거나 찢어서 비빔밥 해 먹던 지하고, 세발나물은 무침하거나 쌈에 같이 넣어 먹어도 맛있다. 시장에서 샀는데 혼자 먹기 너무 많길래."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나는 동네를 옮겨 두 번의 이사를 했고, 그녀는 올해 나를 따라 다시 우리 동네로 이사했다. 떨어진 시간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가까이 지냈다.
10분이면 슬리퍼를 끌고 만날 수 있고, 여름이면 그냥 걸어가다 동네 평범한 팥빙수를 사 먹고, 겨울에는 함께 따뜻한 사케를 마실 수 있다.
큰 건을 치르고는 양곱창과 된장국수를 사 먹고, 가슴이 답답한 날은 전화를 때려서 곧바로 동네 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도 귤을, 두유를, 견과류를, 김치를, 생강차를 나누었다.
생각만 해도 따뜻한 일이다. 가끔씩 떠올려 볼 때면 당신 같은 이웃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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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편에 과일을 실은 트럭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트럭이 아니라 트럭 밑에서 뭘 먹고 있는 고양이를 본 것이다. 나는 가까이 가서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구경했다. 그러자 과일 트럭 아저씨도 곁에 쓱 와서 앉았다. 소시지를 줬다고 그가 말을 건넸고 잘 먹네, 다 먹고 어디로 가네, 히히, 그렇게 고양이를 두고 스스럼없이 굴고 고니 우리는 초면이였다. 그제야 나는 몸을 일으켜 아저씨의 트럭 안을 제대로 봤다. 여름 과일들이 소쿠리에 한 웅큼씩 담겨 있고, 그 뒤에는 상자가 몇 단씩 쌓여 있었다.
(...)
아저씨의 과일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면서, 이것저것을 가리켜 가격을 물어봤다. 과일이 뜻밖에 저렴했다. 수박을 제외하면 모두 5000원이었는데 혼자 먹기에는 넉넉한 양이었다. 나는 곧 아저씨의 단골손님이 됐다. |
담배 아저씨와 말을 섞게 된 것도 고양이 때문이었다. 나는 동네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있었는데, 그걸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장소 선정에 고심했다. 폐가 마당이나 수풀 안,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모퉁이 벽 등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릇을 두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사정을 따르다 보니, 아저씨의 집 담벼락에 그것을 둘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모험을 했다. 다짜고짜 사료를 둬보고, 그릇이 버려지거나 야단을 목격하면 슬그머니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릇이 열흘간 그대로 있었다. 나는 몇 번 사료와 물을 갈았고, 어미 고양이와 새끼가 배를 채우고 갔다. 그러는 동안 그 집 창문에는 불이 밝혀지고 꺼졌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릇이 치워지지 않는다면, 허락으로 여겨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간단히 고마움을 밝힌 쪽지와 과일을 그 집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릇을 채우는 현장이 발각됐고 우리는 멋쩍게 웃었고 그렇게 아는 사이가 된 것이다.
동네에서는 아저씨도 나도 값싼 집을 찾아온 외지인이어서, 서로에게 말고는 인사를 나눌 이웃이 없었다. 나이가 몇인지, 왜 혼자 사는지, 낮에 집에 있을 때가 많은데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고양이 이야기만 했다. "이제는 내가 옆에 앉아 있어도 안 피해요." 아저씨는 그 말을 뽐내듯 했다. 사료를 먹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웃을 듯 말 듯. 그의 자부심에 괜히 내 마음이 놓이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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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그 남자.
지난 뷔페뷔페를 쓰기 시작하면서, 아침 시간을 쪼개어 활용하게 됐다. 눈을 뜨고 50분 산행> 샤워> 식사> 글쓰기를 하며 하루의 시작을 채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번 말한 것처럼) 꼬물딱 거리다 자외선 차단제만 바르고, 빨래에 다다른 옷을 입고, 7시 반쯤 산에 올랐다. 11월이 되었는데, 그날은 어쩐지 춥지 않아서 짙은 초록색 인견 원피스 잠옷에 회색 후드를 입고, 맨다리에 등산화를 매치(?)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재미난 모습이었다.
배산은 아주 작으면서 가파른 동네 뒷산이기 때문에, 멀리서 오는 등산객이 거의 없다. 대체로 동네 분들이 약수터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몸을 풀곤 한다. 아침부터 힘들게 정상까지 오르는 분들은 더더구나 없어서 이르면 이를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조용한 나만의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여러 갈래의 오르는 길이 정상을 향하는 마지막 구간으로 모인다.
오랜만에 오르는 산에서 숨을 헐떡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기척이 느껴져 놀라 뒤를 돌아보니 웬 젊은 남자가 함께 걷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젊다기보다 어리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그는 짧은 머리에 남색 반팔 티셔츠, 짙은 회색의 편안한 바지, 갈색 등산화를 신고, 꽤나 체인이 화려한 은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목걸이를 티셔츠 안으로 떨어트려 체인 부분만이 목 뒤에 반짝이고 있었는데, 예쁜 목선이었다.
인상착의를 소상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날을 기점으로 우리가 무려 열 번 이상 우연히 마주쳤기 때문이다.
배산에서 또래를 만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는 시종일관 뒷짐을 지고 걸었는데, 뒤에서 봤을 때 V자라고 하기보다 왼팔을 직각으로 꺾어 반듯하게 편 오른팔의 팔꿈치쯤을 받치고, 가파르거나 길이 정리돼있지 않은 경사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느긋하게 걸었다. 마치 이 산이 자기 산이라는 듯이, 자기 안방이라는 듯이. |
흰자로 관찰하며 정상에 빠르게 올랐을 때 태양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태양을 따라 움직였다. 태양 앞에 정면으로 서서 가늘게 눈을 뜨고 손바닥을 하늘로 마주 향하게 뻗어올려 살포시 빛을 가렸다. 완전히 가린 것은 아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 사이,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 사이로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도록 아른아른 움직였다.
뭐지.
저 남자.
조그만 면적의 정상에서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도 이상하고, 이쯤에서 시선을 거두고 먼저 길을 나섰다.
11월 1일. 그를 본 첫날이었다.
딱히 알람을 맞춰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느슨하게 그맘때쯤 산을 오르는데,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다다다음날도 그를 만났다.
어떤 날은 그가 나보다 몇 칸 앞섰고, 어떤 날은 그가 먼저 하산하기도 했다.
정상에서의 시간을 꼬박 5일 함께 보내고 나니(?) 이상한 내적 친밀감마저 들었다.
그는 턱스크를 하고 있다가 사람이 오면 착 마스크를 올리곤 했는데, 마스크를 끼지 않은 내가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시간, 산에서 철저한 방역을 지키는 모습에 그가 어떤 성향의 사람일지 상상해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심히 보니, 그는 해를 쫓는다기보다 사람과의 간격을 유지하며 동에서 서로, 서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참.
세상.
재밌는 사람 많아.
그쯤 되니 산에 오를 때 그가 보이지 않으면, 괜히 안부가 궁금해질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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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부터 과일 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추위 탓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두 계절을 보내고 다시 여름이 돌아온 어느 날, 과일 아저씨의 트럭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멀리서부터 뛰어가, 그새 더 야위고 그을린 얼굴에게 말했다.
잘 지내셨어요? 그동안 안 보이셔서…….
네, 좀 아파서…….
우리는 반갑게 웃었지만 둘 다 말끝을 흐렸다. 진짜 안부가 말줄임표에 숨어 저녁 어스름에 묻혔다. 돌아서서 손님에게 다가가는 아저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5000원치의 참외뿐이었다. 아저씨가 봉지 한 장을 털어 공기를 넣었을 때, 다른 손님이 다가와 역시 참외를 달라고 했다. 아저씨가 봉지에 참외 한 소쿠리를 쓸어 넣고 그 손님에게 건넸을 때 나는 약간 의아했다. 내가 먼저 청했으니 당연히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손님이 등을 돌려 멀어지자 아저씨는 쌓아둔 상자 쪽으로 절룩이며 걸어갔다. 상자에서 참외를 하나씩 꺼내 어둑한 알전구 밑에서 꼼꼼히 돌려 보고는 봉지에 넣었다. 여섯 개를 넣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는 내게 내밀며 말했다. "좋은 것만 줬어요."
알이 더 실하고 먼지가 덜 쌓인 것을 주려고 일부러 수고하는 마음. 그것을 씹어 먹으며 허기진 날들을 순하게 보냈다. |
전세 계약이 끝나고 이사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나는 아저씨들에게 그것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 아저씨와 다시 마주치기 전에, 아저씨가 세 들어 살던 집의 개조 공사가 시작된 것을 보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 처음으로 아저씨가 어떤 방에 살았는지 보았다. 내부는 이미 텅 비어있었다. 과일 트럭도 어느 날부터 다시 사라졌다. 아저씨들이 떠나고 생긴 빈자리를 보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해졌다. 정착할 수 없고 작별인사를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존재가 새삼 만져졌다.
(...)
나와 아저씨들은 끝까지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아랑곳 않고 곁을 내주었다. 집 앞 담벼락과 트럭 밑처럼, 거기 둥근 밥그릇처럼, 질박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
그러니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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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이 흐르고, 하고 있는 일이 바빠져 산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가게 된다고 해도 틈이 생기는 시간에 무작위로 오르곤 해서, 가끔은 뭔가 누군가와의 약속을 어긴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평소 오르던 시간보다 삼십 분쯤 늦은 시간 '오늘은 왔어도 이미 왔다 갔겠지?'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상에 올랐을 때 역시 아무도 없었고 괜히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가려 할 때 밑에서 올라오는 그를 마주쳤다.
왜 반가울까.
'잘 살아계셨군요.' 생각하며 하산했다.
다음 날은 정말 움직이기 싫은 아침이었는데 그 사람을 떠올리며 산에 올랐다. 그날도 역시 만나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이 함께 정상에 있는 날도 있었다.
그 친구 다음으로 많이 마주친 사람은 체조 아저씨다. (파란색 바람막이, 버건디 등산바지, 흰색 면장갑) 아마 다섯 번 정도는 뵌 것 같다. 정상석 앞 정면에 딱 가지런히 파란색 바람막이를 벗어 두시고 아주 각 맞춰 박력 있게 체조를 하신다. 가끔은 저렇게 움직이다 오히려 담이 오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다. 그를 만나지 않을 때면 아저씨가 계셨고, 세 사람이 함께일 때도 있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
어김없이 동서남북을 돌며 자연을 즐기던 그는 이제 손가락 사이 빛을 만지다 못해, 동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뭔가 가슴 앞에서 손을 한 두어 바퀴 빙글빙글 돌리다 작은 원을 그리며 머리 옆으로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응?
도대체..
뭐지.
저 남자.
화려한 동작이어서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손끝의 움직임으로 봐서 무용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요가를 하는 사람일까. 대체 뭘 하는 사람일지 궁금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일을 열심히 한 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삼십 대 초중반 그러니까 내 또래 정도의 얼굴이었다.
그 이후 우리가 마주한 모든 날 그는 다양한 동작을 선보였다. 볼 때마다 어김없이 나는 시선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때때로 낯선 등산객들에 좁은 정상이 붐빌 때 그는 그들의 움직임을 피해 내 옆에 바짝 서서 동작을 이어갔고, 그럴 때면 담배 아저씨가 고양이에게 간택당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듯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요. 제 옆에서 맘껏 하세요.' 하면서. 그러다가 낯선 사람과 동선이 스칠 때 그는 마스크를 다시 착 올리곤 했다.
언제나 비슷한 시간을 지키던 그가 오지 않은 날도 하루 이틀 정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몸이 아픈지, 일이 바쁜지 궁금해졌다. 십 분쯤 기다리기도 해봤는데, 땀이 식어 체온이 떨어져서 하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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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그를 만난 날은 사흘 전이었다.
둘밖에 없는 정상에서 성큼성큼 옆에 와 서더니 소리 내 하품을 크게 하고 기지개도 크게, 다양한 동작도 크게 크게 하더라. 언제나 그렇듯 나는 점잖게 흰자로만 그를 보았고, 조용히 내 갈 길을 내려갔다.
날이 추워질수록 아침에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지지만, 누군가와 산에서 지속해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어렴풋한 약속처럼 느껴져 조금이나마 몸을 더 움직이게 된다.
언제까지 우리가 같은 산을 오를지, 언젠가 어떤 말이라도 붙이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와중 힌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속 「과일이 둥근 것은」을 읽게 되어 괜히 소극적이고 조용한 우정에 대해 떠올려 본다. 사실 아침 체육 활동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덧붙이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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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아끼는 영상 하나 동봉해요.
따뜻한 12월 맞이하시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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