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편에 등장한 P의 수업이었다. 정확한 과목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비구상 수업으로 우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작업부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상이나, 글까지 자유로운 형태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특별한 교재랄 것이 필요하지 않은 수업이었는데, 이따금 그는 이 책을 읽어보라, 이 책은 꼭 양장으로 사야한다 말하곤 했다. 그렇게 추천받은 것들 중 하나가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Robert Root-Bernstein, 미셸 루트번스카인 Michelle Root-Bernstein 지음/ 박종성 옮김/ 에코의 서재 (원제 Spark of Genius) 이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모형 만들기 단계를, 모형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모형을 만드는 단계를 거듭하며, 단지 '최종'을 위한 '단계'로서의 모형이 아닌, '모형'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관련된 여러 글을 찾아보며 파고, 쌓다 보니 번뜩 <상상력 사전> 속 모형에 관한 몇 문장이 떠올랐다. 책장 아래 칸 꽂혀있는 책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펼쳐본다. 그날 이후 몇몇 단락은 작업의 과정에서 환기가 필요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지금까지도 종종 찾아 읽고 있다.
설치 작업을 기반으로 조각, 드로잉을 해오며, 한두 해 전부터 만들어 낸 덩어리의 쓰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조각 작업은 판매에 용이하지 않을뿐더러, 특히나 내가 만드는 것처럼 물성이 여리고 보존이 어려운 작품의 경우 더욱이 상업성이 떨어진다. 애초에 상업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들도 아니지만, 당장에 나조차도 쌓여가는 작품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다. 책뿐만 아니라 작업도 부동산이다. 실컷 만들고 놔둘 곳이 없어, 전시 이후 차례차례 쌓여가는 작품을 오래된 시간순으로 폐기하고 있는 작가들이 내가 알기로도 여럿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런 문제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 작업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이고 조형적인 특성을 살린 쓰임이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가구가 될 수도 있고, 생활에 쓰이는 소도구가, 도자 기물이 될 수도 있다.
지난 전시에 만들어 낸 덩어리 중 하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언젠가 뒤집어서 스툴의 다리로 쓰면 귀엽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첫 쓰임 더하기 작업은 스툴로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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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재. 내가 다룰 수 있는 소재여야 한다는 것이 당연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석고의 형태가 나와 있는 상태니 그 위에 실리콘+폴리 FRP*로 겉 틀(몰드)을 만들고, 그 속의 원형을 다시 폴리 FRP+화이바 글라스(유리 섬유)* 로 떠내기로* 했다.
* 폴리 FRP 섬유강화플라스틱. 복합재료의 하나로서 섬유로 강화한 플라스틱이다. 무게에 비해 강도가 높고 부식에 매우 강하다.
* 화이바 글라스(유리 섬유) 유리를 녹여 가늘고 길게 섬유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 떠내다 = 캐스팅하다. 거푸집형(몰드)을 만들어 유동성의 중간체 수지를 거푸집형에 넣고 경화제의 혼합으로 경화시킨다.
임스의 시그니처 체어의 경우 폴리와 화이바 글라스를 주재료로 한다.
상판은 무엇으로 할까. 무엇으로 하건 간에 다리와의 연결부는 어떻게 해결할까.
좋은 가구와 그렇지 못한 가구는 이 연결부에서 차이를 가진다. 얼마나 깔끔하면서도 견고하게, 세심하면서도 세련되게 이 연결을 마감하는가. 소재를 선정할 때처럼 내가 잘 할 수 있으면서, 남들과는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다. 결국은 어떤 부자재나 피스(나사) 없이, 원형> 몰드> FRP 캐스팅 과정을 거쳐 상판과 다리가 일체형이 되도록 작업하기로 했다.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유해한 재료들이 많아, 중간중간 수많은 모형이 필요할 것이다.
모형에, 모형에 또 모형.
모형 만들기는 나에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필요한 형태의 값과 비율을, 명상을 가져다주었다. 모형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각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2, 3차원의 형태 구상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우리의 일상이 꽤 많은 모형 만들기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일주일은, 한 달은, 한 계절은, 한 해는, 삶은 어떤 모형들로 채워져 있을까?
<생각의 탄생>에서 인용한 부분은 붉은색 #b83939 으로 표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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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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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Christopher Isherwood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게 소설을 쓸 때 따르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때 스트라빈스키는 그에게 '모형'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음악평론가 로버트 크래프트 Robert Craft가 스트라빈스키에게 물었다. "당신은 음악에서 어떻게 모형을 취합니까?" 그러자 스트라빈스키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가끔 선대 음악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리듬 장치들을 차용해서 곡을 만드는 데 참고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일정한 작곡풍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이셔우드에게 글쓰기 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모형을 찾아보라고 권유한 것은 그도 자신의 방식대로 해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겪고 있는 소설 집필의 문제를 이미 해결한 전 시대의 작가를 찾아서 자신의 목적에 맞게 그 해법을 변형해보라는 것이었다.
이 글을 통해 '모형'이라는 단어의 영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머릿속으로 연상하듯, 조형의 형태를 가진 3차원의 축소판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를 발표해야 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때, 하다못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루고자 할 때,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거나 계획을 세운다. 그것의 형태는 두루뭉술할 수도 있고 세밀하게 종이에 옮겨 적을 수도 있다. 아무리 무계획인 사람도 복잡한 일을 이루어내야 하거나 신경 써야 할 항목이 많아지면 그것 속에서 체계를 잡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언제나 시간은 한정된 것이니까. 그런 과정들은 무형의 모형 만들기 같다.
(무형의) 모형 만들기가 시작되면, 해당하는 대상 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추출하게 된다. 시뮬레이션이 원형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앗, 뒤에서 소개하겠지만 이 모형이 원형보다 더 세밀하거나 거대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 대체로 어떤 형태든 상황이든 우리에게 당면했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다시 말해 꼭 지켜야 할 것과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을 구별하게 된다. 모든 것들을 가질 수도 없고 늘 완벽할 수도 없다. 가끔은 운 좋게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지점은 언제나 더 이윤을 남기거나 도움이 되는 선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는 "어떤 대상의 모형을 만드는 일은 그것을 소유하는 일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과제나 상황, 형태들을 모형 만들기를 통해 더욱 면밀하게 뜯어 봄으로써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조금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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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 인물)
H. 조지 웰스 H. George Wells
1866-1946, 영국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전쟁 게임에 심취해 차를 마시러 온 손님에게
'앉아서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거친 인사를 건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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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의 조각은 스툴의 다리가 되면서 1:1의 모형이 되었다. 모형은 실물과 같거나, 작거나, 클 수 있다. 1:1 다리 캐스팅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몇 배 더 작은 종이 모형을 만들었다. 가장 이상적인 상판의 비율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용도에 맞춰 모형의 크기를 결정하게 되는데, 여기서 용도는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것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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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게 만들어진 모형으로 조지 루카스 George Lucas의 <스타워즈 Star Wars>를 떠올린다. 영화를 찍기 위해 세운 세트는 우주를 가상의 모형으로 만든 것이었다. 초기의 스타워즈를 본 사람이라면 그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대번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무엇이 있을까. 어린아이들을 고래나 공룡의 작은 모형을 가지고 욕조나 모래 속에서 즐겁게 논다. 손바닥 크기의 모형을 다듬을 때 신이 된 것 같다고 말했던 헨리 무어 Henry Moore가 떠오른다.
반대로 원형보다 큰 모형을 만드는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세포나 원자를 실제크기보다 수백만 배 더 큰 모형으로 만드는 일은 수천수백 가지 실험 결과와 정보를 집대성할 수 있게 하며, 이는 보다 정교한 이론적 구축물을 나타내준다. 심지어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인간의 머리나 심장 모형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보는 관람객들은 마치 자신들의 입 속이나 귀, 피의 순환을 따라 탐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엄청난 크기의 모형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주 작고 부속적인 어떤 것들, 이를테면 적혈구라든지, 세균, 분자, 공기가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
모형 작업은 많은 상상 기술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것들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모형은 대상이 되는 시스템이나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한 다음에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상의 중요한 특징을 잡아 사람이 다루기 쉽게 크기를 조정하는 등의 단순화 과정과 형을 떠내거나 언어적, 수학적, 혹은 예술적 수단을 통해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실제로 모형을 제작하려면 그 모형이 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간에 여러 가지 다양한 제작 수단과 소재에 대한 이해와 깊은 분석이 있어야 한다.
모형을 만들어 가는 동안만큼은 일어나는 어떠한 상황이나 대상, 혹은 생각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 이해가 부족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고 마음껏 실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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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와 그녀의 작업실.
거대한 거미 조각으로 유명하나,
나는 그녀의 드로잉 작업을 더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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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는 작품을 만들 때 항상 일정한 단계를 밟는데, 그 단계란 스케치에서 시작해서 판지 모형, 골판지 모형, 나무 모형을 거쳐 마지막에 가서 돌에다 조각을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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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무 노구치 isamu noguchi와 그의 스튜디오.
오랜만에 또 등장.
그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6편을 열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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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무 노구치 역시 먼저 간단한 그림을 그리고 모형을 만드는데, 이 단계에서는 주로 종이를 사용한다. 그다음 금속이나 다른 소재를 이용해서 모형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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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무어 Henry Moore와 그의 작업실.
모형 끝판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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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헨리 무어는 단계별 모형제작을 위해 3개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모형 스튜디오에서는 손만 한 크기의 모형을 만들었고, 또 다른 임시 스튜디오에서는 작품의 크기를 조정하거나 그 소재를 손보는 작업을 했으며, 커다란 완성품은 세 번째 '정원 스튜디오'에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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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개에서 11개 정도의 작은 모형들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오직 한 개만이 실물 크기의 조각작품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마음에 들 때까지 이것을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 일단 이 모형은 크기 때문에 작은 모형으로 일할 때와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조각이란 모형을 만들고, 크기를 키우고, 실제로 돌을 깎는 일의 혼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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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을 통해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를 파악하고, 경험하기 어려운 것에 접근하고, 이해가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나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에 대해서 말했지만, 루이스 부르주아, 이사무 노구치, 헨리 무어는 단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정확한 목표치에 닿기 위해서 매번 이런 과정을 반복했을까?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작업실에 머물며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만 보아도, 이 과정을 얼마나 좋아하고 즐겨했는지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0개 11개의 손바닥만 한 모형을 만드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들도 목적을 가지고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겠지만, 이런 행위에 심취하여 거듭 반복하며 필요한 결과와 더불어 예상하지 못한 반짝이는 순간을 만났을 것이다.
문득 거의 매일을 등산하던 시기가 떠올랐다(그러고 보니 추워지고는 발길을 아주 끊었다. 조만간 다시 매일 뒷산 타기를..). "산 타기를 즐깁니다." 말하면 몇몇 사람들은 내게 산에서 본 것과 느낀 것, 산을 찾는 마음 같은 것보다 산 타기의 이로운 점, '효능'을 물어왔다. 산책에 푹 빠져있을 때도 "걸으니 어때요? 좋아요? 뭔가 달라졌나요?"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분명히 여러 이점이 있긴 했지만, 이런 류의 질문을 만날 때면 즐기는 것에서도 뭔가를 획득해야 하고, '잘 즐기는 것' 역시 목표로 삼아야 할 것만 같아 마음이 쓰였다. 물론 목표를 삼아 움직이더라도 그 속에서 예상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만나고 자연히 스미겠지만, 내 입장에서 무언가 얻기 위해 하는 등산은 생각만 해도 지치고, 무언가 남기기 위해 하는 산책은 생각만 해도 재미가 없다. 때로는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언제나 가장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인 것을 따져가며 움직이고 싶진 않다.
산길을 걸으며 주운 고운 나뭇잎, 예쁜 새소리, 나무 사이를 통과해 불어오는 바람, 새벽 비가 내린 뒤 깨끗한 공기 속 돌계단 한 칸 한 칸마다 흐르는 물이 만드는 미니 계곡, 올라갈 땐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내려올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풍경을 보며 '자연 참 인생 같아. 내려가게 될 때 잘 내려가야지. 미끄러져 크게 다치지 않도록 사분사분.'하는 생각들은 내가 산을 타며, 산책을 하며 우연히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런 나도 산을 찾고 길을 나서게 된 그 시작의 이유는 분명 있었다. 속이 답답하고 마음은 자꾸만 가라앉고, 조용한 곳에서 건강한 방식으로 몸을 괴롭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디라 해도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아름다울 것이므로. 집으로 돌아올 때 자연은 언제나 기대하여 바라지도 않은 작은 선물을 주머니에 넣어주곤 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모형 만들기 역시 이유나 목적이 있긴 하지만, 결국 좋아서 좋아하는 행위이다. 자연에게 받은 선물처럼 모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만난 반짝이는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정확하려 노력했을 때 생겨나는 오차는 따스하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정확하려 최대한 노력한다는 것에 있다. 무언가를 커팅할 때 컴퓨터로 형태값을 입력하여 레이저로 커팅을 할 수도 있겠지만(그마저도 열에 의한 오차가 발생한다.) 칼을 손에 쥐고 최대한 애써서 정성스레 자른 면이라거나, 곡선자와 직선자로 성의 있게 위치를 표기한 뒤 그려낸 어떠한 형태의 연속, 그 테두리 속을 최대한 말끔히 채워보는 물감의 물성 같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이 사람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진심이었는지 그 떨림이나 미묘한 오차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기준선이 불분명하고 희미하면 다음 선 하나를 평행하게 긋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지난 13편 <티파사에서의 결혼>을 만들며 (클릭으로 13편 보러가기) 다시 한번 와닿은 부분이라 적어두기도 했었다.)덮어두고 대충 그어버리거나, 삐딱한 선을 기준으로 평행을 반복해서 잡게 되면, 차곡차곡 쌓인 오차로 어느 순간 형태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그런 과정들은 괜히 삶의 부분을 겹쳐 비추어보게 한다. 기준이 흐릴 때 멀리 떨어져서도 보고, 눈을 게슴츠레 흐리게 뜨고도 보고, 서두르지 않고, 그 속에서도 대략적인 평균점을 고민해본 뒤 성심성의껏 다음 선을, 그다음 선을 그어나가야 한다.
자를 대고 연필을 좌에서 우로 주욱 미끄러지는 긴 선분을 긋는 것이 좋다. 3편 속 [곁에 둔 작업 보기(클릭으로 3편 보러가기)]에 등장하는 이아람 작가님의 작품을 갖게 된 뒤로부터 더 좋아하는 순간이 되었다. 힘과 속도를 아무리 동일하게 유지하려 해도 생겨나는 편차. 흑연의 물성과 손의 힘, 중력, 긋는 가속이 만나며 시작점과 끝점의 두께가 절대 같을 수 없는 것을 매번 발견하게 된다. 너무 재밌지 않은가?
자에 대는 촉의 방향을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목공을 하거나 정밀한 작업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은 다들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한쪽에 쥔 필기구를 기준 되는 자 옆에 댈 때 그 각도가 바닥 면으로부터 수직이거나 둔각이거나 예각인 것에 따라 선의 위치가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 어떤 습관을 가지든 상관없지만 본인이 편한 하나의 방식을 기준 삼는 것이 좋다. 나는 바닥과 자가 만나 이루는 작은 90도 안에서 45정도 펜을 기울여 촉의 끝이 정확하게 자의 끝에 맞물릴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을 가졌다. 며칠 전 방심하고 원형자에 촉을 직각으로 대고 원형을 그려 오려낸 적이 있었다. 원기둥의 윗면이었는데, 1-2mm 차이로 윗면이 꼭 맞물려 닫히지 못하고 기둥 사이로 툭툭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다시 자를 대고 그린 선 속에서도 가장자리를 기준으로 오려내어 기둥을 마감했다.
거듭 반복하는 모형 만들기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 이렇게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가장 큰 효능은 울적한 기분을 날려주는 것에 있다. 날린다기보다 울적할 틈이 없다. 울적하다가 계속 오차가 생기기 때문에, 언제나 집중해야 한다. 굉장히 집중하며 하나의 선을 긋는 행위는 나에게 명상하는 시간이 된다.
꼭 형태를 만드는 것 외에도, 다이어리에 한 달, 한 해의 계획을 쓰거나,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여러 소스를 기승전결에 맞게 나열하거나, 발표를 앞두고 목소리를 내어 미리 연습해보거나,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에 대해 경험이 많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적용해보거나, 하다못해 오늘 점심에 뭘 먹을지 그것을 먹음으로 인해서 좋을지 나쁠지 연상해보거나, 연인에게 만들어 주고 싶은 음식을 미리 연습해본다거나 그 모든 것이 유무형의 모형 만들기와 같고, 우리는 그런 과정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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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종이에 모형의 형태를 옮겨 그리고 여러 색깔을 조합해보는 그리기로서의 모형 만들기에 돌입할 것이다. 동시에 상판의 몰드를 만들어 캐스팅하고 수평을 잡아 다리와 합체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다음으로는 글라인더로 도드라진 요철을 살짝씩 날리고, 열풍기로 구우며 잔잔한 요철을 조금씩 더 정리해주고, 미친 듯한 사포질과 퍼티 틈메우기를 끝없이 반복할 예정이다. 페인트 조색을 하고, 프라이머로 밑 작업을 한 뒤 마스킹 테이프로 구획을 나누어 후끼로 도색을 할 것이다. 균일하게 도색 작업이 끝나면 마감재로 코팅하여 마무리한다.
이렇게 완성이 될거라 생각하겠지만, 꽤 높은 확률로 이 스툴은 다시 모형이 될 것이다. 마감재까지 마무리된 스툴을 시험적으로 다루어 봄으로써, 사용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비율이나 형태는 만족스러운지, 견고한지 등등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어떤 단계로 돌아가게 될지 운 좋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을 지 모든 것은 가보아야 알겠지만. 지금 좇고 있는 최종의 지점은 또 다음을 위한 모형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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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은 이번 글을 읽고 오히려 즉흥적으로 형태를 만들어가는 라비 샹카르의 시타르를 보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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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이미지와 곡명을 클릭하시면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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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सितार> 의 궁극적인 목적은 즉흥 연주에 있다.
구루가 언어를 음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으며, <라가>라는 기본적인 음계를 구조로 한다.
위의 뮤지션은 내가 좋아하는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르이다.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노라존스의 아버지이며, 비틀즈 조지해리슨의 시타르 스승이자 전 세계에 인도 전통음악을 알린 대단한 시타르 거장이다.
전통적인 음의 뿌리로 자신과 신, 대중과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는 그의 즉흥 연주, 만약 음악으로 어떤 형태 또는 모양을 느낄 수 있다면 라비 샹카르의 음악은 꿈틀 꿈틀거리는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용이나 뱀의 형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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