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에게
기울임체로 쓰인 글들은 어딘가에서 가져오거나 가져온 것을 변형한 것 입니다. 하단 짧으막하게 출처를 함께 기입해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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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특별한 기대를 걸지 않겠습니다. 새해를 마치 처음 태양이 뜨는 것처럼 맞지 않겠습니다. 새해에 갑자기 내가 착한 사람이 된다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망상도 접겠습니다. 새해에는 돈을 많이 번다든가 건강이 넘치길 바라는 터무니 없는 꿈을 꾸지 않겠습니다.
다만, 새해에는 잘 보고, 듣고, 말하겠습니다.
* 김창완/ 2014 SBS 연기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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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마른 땅이 빗물을 빨아들이듯. 힘껏 달았고 거침없었고 이내 무겁고 축축하고 차가워져 버렸습니다.
내게 이미 없을 거라 단언했던, 작은 씨앗을 발견하고, 그 씨앗을 물에 빠트려 수중에서 배양해보려 했습니다. 마음같이 자라나지 않아서, 다시 꺼내어 비옥한 땅에 묻고 비가 내리길 기도하기도 했지요. 좀처럼 발아하질 않더군요. 애타는 마음이 몇 번이나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어느 날은 타오르는 불 속에 씨앗을 던져버렸습니다. 씨앗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껍질은 재가 되어 바람결에 날아갔고요. 어쩐지 고소한 냄새가 건조하고 뜨거운 방안을 가득 채우더군요. 그런 한 해와 연말이었습니다. 씨앗의 이름을 무어라 명명하면 좋을까요.
곱게 구워진 고소한 견과를 지켜보며 망설이다, 입 속으로 날름 집어넣고 오도독오도독 씹어먹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독이 될까요. 힘이 될까요.
인생이란 묘한 것이지요.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경험을 해보셨나요?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떠올립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셰에라자드/ 변형
애초부터 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날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박정만 시인의 자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다가올 것이고, 어떤 것은 떠날 것이고, 어떤 것은 남을 것입니다. 때로는 떠난 줄 알았던 것이 다시 다가올 수도 있겠지요. 그 속에서 우리는 어김없이 진심을 다해 대체로 미온하다가 뜨겁게 웃고, 차갑게 눈물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특별한 내일이나 새롭게 떠오르는 해는 없고, 모든 순간이. 어제와 오늘, 내일이 동등하게 소중한 날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봅니다.
하지만 기도만은 하고 싶습니다.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빌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욕심쟁이인가 봅니다.
* 박준/ 기도에게
지난해 12월 초부터 새해 인사와 비슷한 글을 쓰다 보니 씨앗과 새라는 단어가 툭하고 튀어나왔고, 기노를 떠올렸습니다. 그해 네 번의 계절을 돌아 다시 겨울이 되는 시간, 기노는 나에게 한 마리의 새, 발아하지 못한 씨앗, 구워진 견과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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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에게
기노. 잘 지내니.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봤어. 어떤 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잘 지내냐는 뻔한 안부를 우리는 참 많이도 물었어.
너는 언제나 잘 지낸다 말했고, 난 언제나 잘 지내지 못한다고 말했지.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꽤 비슷한 농도로 잘 지내거나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히 안심하곤 했어.
문득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16>을 떠올려.
너무 쉬운 너의 열한 자리 전화번호를 몇 번쯤은 누르고 싶기도 했지만,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기로 했어.
나는 쉽게 타오르거나 넘쳐버리는 사람이니까.
내가 알았던 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떨 땐 네가 과연 어딘가에 실존하는 인물인지, 꿈속에서 만났던 인물은 아닐지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해.
내 머릿속에 지우개는 잘 지내. 대체로 내가 걸어가는 속도와 비슷하게, 한 열 몇 걸음 뒤에서 보폭을 맞추고, 한 칸 한 칸 정성껏 기억을 지우며 따라오고 있어. 이대로 살아가다가는 언제쯤 너에 대한 감각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 같아서(어쩌면 그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지우개가 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마다 재빠르게 너에 대한 지난 기억과 내 마음대로 내렸던 판단들 따위를 두서없이 기록하기로 했어.
누군가 “기노는 정말 실존 인물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꾸며낸 이야긴가요?” 묻는다면, 물론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할 수 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 같아.
문학의 집에는 여러 개의 입구가 있지. 계단과 양옆의 기둥까지 갖추고 있는 정문이 있어. 그 문으로 들어갈 때는 마치 궁전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또한 옆문도 있어. 더 소박하고 더 개인적인 문.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고독해. 그들은 혼자 다니거든. 그리고 뒷문이 있어. 부엌으로 바로 들어가는 문, 요리사와 접시닦이,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문이지. 그곳은 항상 소란스러워.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바로 그 문이 기노 너와 내가 이용한 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서로에게 말을 건네며.
* 존버거/ A가 X에게 서문 중/ 변형
그 뒷문, 계절을 담은 창과 학교 스탠드처럼 높은 계단 참에서 스쳤던 감각들을 더듬어 기록해. 꼭꼭 씹어서 글로 눌러적은 마음을, 언젠가 다시 발견하겠지. 그때는. 분명 내 글씨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머쓱하게 웃음 짓고, 재미난 남의 이야기를 읽듯 빙긋 올린 입꼬리로 팔랑팔랑 노트를 넘겨 볼 수 있길 나는 진심으로 기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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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널 만났을 때, 그 무렵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에도 너를 계절로 따지자면 겨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네가 함께 겨울이길 바라서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만난 계절이 겨울이여서? 혼자 남겨진 나무를 떠올렸어. 잎을 다 떨구고 말없이 서서, 차가운 바람에 작은 가지 조금씩 흔들리는 어리지 않은 나무를. 사랑이나 온기를 기다리는. 때로는 따뜻하고 하얀 햇빛이 나무를 한 방향으로 내리쬐기도 했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됐어. 어쩌면 네가 여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아버렸거든. 넌 생각보다 뜨거운 볕 같았고 푸르고 작은 언덕 같았어.
괜찮지 않지만 괜찮고, 괜찮지만 괜찮지 않은 정도. 다시 말해 버틸만해 보였어. 어쩌면 너의 중심은 여름에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궤적을 빙글빙글 돌며 때로는 꼭 맞게 겹치기도 했지만. 원을 그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너비가 좁아지다, 비로소 나는 겨울로 돌아오고 말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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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의 잠 속까지 따라왔다 신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밤마다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예요 물어도 겨울을 나기 위해선 장작이 더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장작은 이미 충분해요 생각만큼 겨울이 긴 것도 아니고요 나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그가 몸을 좀 녹였으면 했다
그를 녹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그는 텅 비어 보인다 한모금 한모금 마실 때마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그가
녹는다 식탁 위엔 덩그러니 찻잔만 남아 있다
나는 깨어 있는 사람인가요 잘 깨어 있는 사람인가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철로의 입장에서 보면 기차는 무서운 반복일 뿐이에요 말한다
낮게 나는 새들이 있고 그보다 낮을 수 없는 마음이 있고
누군가 나를 흔드는 것 같다
밤새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었노라고
돌아오지 못할까봐 겁이 났었노라고
* 안희연/ 선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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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겨울이라 생각했을 때,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네가 늦가을쯤이길 바랐을 때, 그렇게 마음대로 너를 외롭게 상정해두고 온기를 가지고 달려가고 싶었어. 그것은 얄팍한 동정의 마음이 아니라, 그냥 그런 네가 좋았어. 온기라고 하면 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처럼 느껴졌거든. 나 불이 많잖아. 뭔가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만 같아서, 오히려 내가 살아가는 데 힘을 얻었어. 무기력한 마음들이 순간마다 조금씩 휘발되는 느낌이었어.
기노,
너를 향한 내 마음만은 봄과 여름처럼 따뜻했다가 이어서 뜨거워졌어. 동시에 그런 마음이 이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혹시나 추운 겨울에 있다면, 그 겨울에 있는 것이 때때로 너무 쓸쓸해서 마음이 시리다면. 봄과 여름의 손짓과 난풍을 무시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생각했다기보다는 감각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부하듯 관계를 바라보진 않았으니까.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감각이었어.
너는 불이 필요하지 않은 여름에 있었을까? 지금도? 어쩌면 한여름 폭염 속일까?
삶도 관계의 흐름도 감정도 누구나 봄과 여름이 지나면 곧 가을, 겨울이 와. 내 마음도 봄과 여름같이 뜨겁다가 결국 언젠가 가을, 겨울을 맞이하겠지. 예외란 없는 것이니까.
결국 문제는 긴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야.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보지 않은 것은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어쩐지 나는 높은 확률로 가을과 겨울을 잘 보내지 못할 것만 같거든. 한때 기노 너와 함께라면 그 춥고 긴 겨울을 조금은 다르게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들기도 했었지만. 나는 고요하고 싶다고 요란하게 외치며 늘 그렇듯 모순적으로 가을 속을 빠르게 통과하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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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나 꽃보다는 나무라고 하자
관목보다는 교목이라고 하자
침엽수보다는 활엽수라고 하자
초록이 무성하다가 때로는 앙상하다고 하자
침묵이라고 하자
개보다는 새라고 하자
비가 내리기 전 낮게 나는 것으로 하자
비보다는 눈이라고 하자
찻잔 아래 동그랗게 고인 찻물이라고 하자
그렇게 어디에나 있다고 하자
질리지도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거리에 언제나 있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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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여름에 자라기로 결심했다 나무는 올여름에야 겨우 나무가 되었으나 자신이 언제부터 나무가 된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나무는 종종 자신의 몸을 오르내리는 이것이 사슴벌레인지 아니면 장수하늘소인지 알고 싶다 나무는 서서자는 나무,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무는 간혹 누워서 잠들고 싶었으나 나무에게는 의지가 없다 나무는 여름이라는 것이 끝나면 무엇이 오는가 어떻게 되는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서워지기도 하였으나 나무는 그저 기다린다 나무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여름이 끝나고 오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하나…… 나무는 생각이라는 것에 빠져서 자꾸 죽으려 하고 있었다 나무는 죽는 것에 가까운 것이 되고 있었다 나무는 이 여름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황인찬/ 서정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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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에게 3
비가 오길 기다리니 쨍한 날이 이어지고 있어.
얼마 전 소나기가 내려 정상을 앞에 두고 오르지 못한 오름을 다시 오르고, 삼나무 숲에서 도시락을 먹을 때였어. 새까만 모기들이 끈적한 다리를 공격해오고, 나는 차지게 종아리를 내리치며 잡다한 지난 생각에 빠졌었지.
기다림은 언제나 설레고 동시에 괴로운 것이지. 항상 보글보글 잔잔하게 끓고 있는, 성숙하지 못한 나는 괴로움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질 때가 대부분인 것 같아.
결국 매일이 어떤 것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살아가는 것이 기다리는 것의 연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기다려온 지난 시간들을 어떤 식으로 채워왔는지 떠올려봤어.
한숨이 나오더라.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다시 숲을 걸었어.
그래서 오늘의 난 어떤 모양이 되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하루의 주체마저도 내가 맞나? 하는 생각,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게 된 것일까 생각하는 순간.
아침 이슬이 축축하게 젖은 얇고 긴 이파리 하나가 다리를 핥고. 뱀의 혀는 차가울까? 떠올리며 조온윤 시인의 무족영원을 다시 찾아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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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마뱀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꼬리와 다리를 뚝뚝 떼어낸 뒤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무릎을 감싸고 넘어져 있는 내게
도마뱀이 다가와 물었다
넘어지는 기분이 어떠니
넘어지기엔 다리가 부족한 도마뱀에게
넘어지는 기분을 설명해 줄 수 없었다
도마뱀은 넘어지는 기분을
벌목같이 쓰러지는 그 기분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시간 동안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쓸모없는 내 다릴
떼어버리겠다고
핸들을 잡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지나간다
자랑처럼
아이가 두 팔을 날개처럼 펴지 않게 될 때
달리기를 하자고
들뜬 마음으로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네가 나무였을 때
나의 부족함이 너의 간절함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양손과 양발을 모두
똑바로 걸어가는데에 사용했다
그래도 얼마 못 가 다시 주저앉게 될 때
나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다고했다
부족한 것과
무족한 것은
어떻게 다르냐고
도마뱀이 말했다
무족한 것은
넘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영원하겠지
하지만 넘어져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내밀어 볼 수 있는 손이 없다면
영원따위는 주머니에 넣어 두고 꺼내 보지않는
슬픔일 것 같다
몸뚱이만 남은 도마뱀의 내 다릴 휘감았다
냉혈동물의 육각형 피부
무릎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
그 위로
눈송이처럼 내리고 있었다
* 조온윤/ 무족영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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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표면적으로 애초에 그 어떤 감정의 너울이 없다는 듯이 격앙되는 법이 없고, 크게 절망하여 한탄하지도 않았다. 고요를 열어젖히면, 여러 각도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파도들이 서로 부딪히고 부서져,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가 무지개를 이룰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의자에 앉은 동세와 표정만은 그저 너를 그대로 지켜보는 것으로 나의 일을 다하였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다. 불현듯 여기서 이상한 '공백'이 발생된다. 웬만해서 망설임 없이 엉뚱한 질문을 잘도 하는 나였다.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사람도 어려워하지 않는 것이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 나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 앞에서만은 많은 말들을 삼키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묻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 질문도 떠오르질 않는 것이다.
끝내 주체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거리두기가 아닌,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거리두기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공백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소음을 지우면서 스며들 듯 사방으로 번져 나가고, 그와 만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이내 정적에 둘러싸여 이상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백 속에는 쉽게 대상을 규정하거나 침범하지 않으려는 품격이 있고 배려가 있으며 예절 바름이 있었다.
* 황인찬 시인 <구관조 씻기기> 속 박상수 시인・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 <서글픈 백자의 눈부심> 中 '2 신비의 전도사' 부분을 사이사이 변형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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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침묵하지 않으며 떠들었지. 끝도 없이.
침묵을 동경한다고 말했지.
그것이 침묵에게 내가 가지는 첫 번째 감정이었고, 가장 큰 감정이었어.
다음으로는 침묵을 사랑했고, 침묵을 미워했어.
가끔 나는 내가 병에 걸린 것만 같아.
그 병은 말의 준비 기간을 가지지 못하는 병이야.
어떤 말도 펄펄 날리고, 조심성 없고 무게감 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병. 그렇게 쏟아져 나온 말들이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혔을 거야. 알면서도 자꾸만 말에 집착하게 돼. 듣는 말, 하는 말.
때로는 말이 마음을 이기기도해.
가슴이 답답해. 그럴 때면 침묵하는 사람들이 미워져.
같이 동조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 같아서 질투가 나.
조용한 사람은 언제나 나보다 강해 보여.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관점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쩐지 그런 마음이 돼.
그래서 침묵을 사랑해.
엄밀하게 말하면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침묵하는 사람과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사랑해.
부드러운 침묵, 다정한 침묵을 사랑해.
한쪽에서 당신은 당신의 일에 집중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고, 각자의 움직임이 만드는 소리만으로 채워진 공간을 사랑해.
그러다 지루해지거나, 답답해지거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나누는 의미 없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 일상적이고 가벼운 말들을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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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그림자가 우거져 있었다
우는건 새가 아니라 새의 마음이었다
숲으로 가 숲을 보는 대신
눈을 감고 숲의 고요를 떠올렸다
잠을 자려다 문득
내가 원하는 건 잠이 아니라
잠 속의 산책이 아닐까
행복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숲의 그림자와
그림자의 숲
잠 속에서 나는 어딜 걷고 있는 걸까
새는 안 보이는데 자꾸 새의 그림자만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누군가는 날아가는 새떼를 가리키는데도 여전히 |
발 밑에 떨어진 그림자만 보고 있었다
거기서
새의 마음을 찾으려는 것처럼
눈을 뜨지 않아도
눈꺼풀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새를 기르지 않아도 새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 조온윤/ 그림자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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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날 문득 새를 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
(...)
그날 이후 그는 매일 그곳에 가서 새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새는 오지 않았지만
새의 먹이를 잘게 잘라 접시 위에 올려놓거나
물그릇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다보면
하루하루 시간이 잘 갔다 계절이 바뀌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절망에 사로잡혔다
하루는 비슷한 새를 구하러 나서기도 했다
모란앵무, 금화조, 카나리아, 자코뱅
상점 유리창 너머 주인을 기다리는 알록달록한 새들을 바라 보았지만
어느 것도 그 새는 아니었다 어떤 것도 그 새는 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새와 관련된 모든 책을 읽었다
그는 새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고 새에 관한 일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의 집 어디에도 새는 없었지만
그가 새를 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그는 새를 기다리러 간다
그의 새장은 아직 비어있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영영 오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 안희연/ 반려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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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에게 2
이사 온 집에서 보내는 첫 번째 겨울이야. 가장 빠르게 추워지는 곳은 역시나 화장실이구나.
샤워할 때 온수를 기다리며 손가락 끝으로 물기둥을 끊어내는 시간이 길어졌어.
차가운 손끝이 약간은 뜨겁다 느껴질 때, 퍼지는 물의 각도 속으로 몸을 정확하게 밀어 넣어. 숱 많은 머리카락부터 두피까지 충분하게 적실 때 쯤, 작은 화장실을 가득 채운 희뿌연 기체. 농도 짙은 수증기의 냄새가 직육면체 가득 빼곡하게 차올라. 모두 같게 생긴 샴푸와 컨디셔너의 깨알 같은 이름을 눈 가까이 가져와서 읽어내야 해. 그사이 머리카락은 몇 번이나 잘랐는데도 어깨를 넘어섰구나.
우리의 시간은 생각만큼 짧았고, 생각보다 길어서 마주 앉아 나눈 이야기들이 벌써 투명한 것 없이 희뿌옇게 가득 차버렸어. 분명 우리가 만났고 마주 앉았었어. 그렇지? 어떤 이야기도 선명하게 기억하기가 어려워. 그 시간을 기록해둔 노트가 남아 있어서 참 다행이야.
남겨진 흔적들을 뒤적이다 보면 희미한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다운 형태로 왜곡되어, 그 잔상만 어리어리 떠올라.
고약하게 구겨져 꼬깃한 마음의 주름에 따뜻한 습기가 배어들고, 서서히 경사가 완만해지고 있어. 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무늬가 되어 남겠지만.
흐려진 것들을 선명하게 바로 잡고 싶은 마음과 이 모든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매일같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어. 어제는 전자가 승리를 거두었고 오늘은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 나도 내 마음을 알아보기가 어려워져. 어떤 날은 믿기 어려울 만큼 고요한 시간이 이어지지. 고요를 알아차릴 때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요의 끝이 찰나에 스치고, 순식간에 몇 배나 커진 두려움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눈앞에 쿵 하고 떨어져.
나는 잘 지내지만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그곳에서 너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부디 무탈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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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보세요, 이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이 있지요. 커다란 물고기 떼가 바다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파도 사이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답니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 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속이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저도 어쩌다 그 빛나는 잔물결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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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옷이 마르듯 하루종일 너를 생각하지 않고도 해가지는 날이 오겠지
* 김용택/ 젖은 못은 마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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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GARAMI
"영상에 비치는 모든것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것들이존재 할까요?"
"하지만 영상과 음악은 항상 살아있는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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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폼의 확인이 어려워 버튼을 삭제하였습니다.
메일 회신으로 다양한 의견 편히 보내주셔요-
언제나 대환영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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