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손가락에 두 바퀴 감긴
머리카락을 풀고 고쳐 앉아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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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꽤 오랫동안 꽂혀있던 읽지 않은 소설책이 있었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던가.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산 책 중에 읽는 거다. 내게는 책꽂이 구석구석, 아직 손이 닿지 않은 책들이 있다. 그것은 나의 재산. 나만의 작은 서점, 맞춤형 큐레이션이다.
읽지 않은 책이 주는 부채감은, 은근하게 겹겹이 축적되어 괜스레 아무 책을 집어 들고 표지만이라도 한 번 더 들썩이게 하는 효과를 준다.
그 소설책은 틈만 나면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등의 제목을 주시할 때면, 저 책장을 열어젖히는 순간, 아마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비교적 일찍 퇴근한 어느 날, 드디어 책을 펼쳤다. 그런데 몇 페이지쯤 넘겼을 때, 어쩐지 모든 장면이 낯익었다. 심지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전개와 종국에 소설이 던질 화두가 무엇일지까지 섬세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동명의 영화를 봤나?' 검색해보았다. 고전이라 영화는 존재했지만, 내가 본 적 없는 장면들이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몇 페이지 더 넘겼을 때 알았다. 언젠가 분명 이 책을 읽었었고, 읽었던 책은 어디론가 떠나서 없어졌고, 아무렇지 않게 나는 이 책을 다시 사두었다는 것을.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민음사) 였다.
(실로 책장을 열어젖히는 순간에, 아마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는 소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처음 읽었을 때 그랬던 것 같다. 이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살인을 저지른 삼류 건달과 내연녀에게 진심으로 연민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엄청나게 잘 읽히고, 두께가 얇다. 관심 있다면 읽어보시길.)
요즘 부쩍 읽고 싶은 책을 펼쳤을 때, 더 심각하게는 한참을 읽고 나서, 그제야 이미 읽었던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문재 시인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부분을 떠올린다.
놀랍다.
산문집이 작업실에 있어서, 아침에 출근해 책을 뒤적거리니 아무리 찾아도 내가 생각한 부분이 없는 거다. '다른 책이었나..' 집에 와서 이문재.. 이문재.. 들여다보니 시집밖에 없고, '앗, 황현산 평론가의 『밤이 선생이다』였나?'하면서 뒤적여봐도 그 부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에 찾아내고 말았는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 한 부분이었다.
도대체 이 개연성 없는 기억의 조각은 무엇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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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는 좋은 책을, 그것도 아주 썩 좋은 것을 집었다고 깨닫는다. 그것은 완벽한 문장과 지극히 명확한 사고의 흐름으로 짜여 있다. 결코 알지 못했던 흥미 있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굉장한 놀라움이 넘친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이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곧 보게 될 것처럼,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의 규명에 도움이 된다. 말한 것처럼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훌륭한 것으로, 문장 하나하나에서 얻는 바가 크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읽으면서 자리에 앉고,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오로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새로운 귀중한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때때로 누군가 그어 놓은 밑줄이나 책 가장자리에 연필로 긁적거려 놓은 감탄 부호 ⎼ 나보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이 남겨 놓은 흔적으로, 평상시에는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 가 이번만큼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야기가 그만큼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문장이 알알이 경쾌하게 이어져 이 연필 자국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쩌다 그 흔적이 눈에 뜨이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마음에서이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이 ⎼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조차 못한다 ⎼ 나 역시 심히 열광하는 바로 그 자리에 밑줄을 긋고 감탄 부호를 찍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할 데 없이 뛰어난 글의 내용과 누구인지 모르는 앞서 책을 읽은 사람과의 정신적인 연대감에 의해 이중으로 고무되어 계속 책을 읽어 나간다. 그리고 점점 더 깊이 허구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경탄에 경탄을 거듭하면서 저자가 인도하는 멋진 길을 따라간다……. |
그러고는 분명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곳이 이르러 나도 모르게 <아!> 큰 소리 내어 감탄한다. <아,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그 얼마나 멋들어진 표현인가!> 나는 한순간 눈을 감고 읽은 것을 깊이 반추해 본다. 그것은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는 내 의식에 길을 내고 유례없이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고 새로운 인식과 연상들을 샘솟게 하고 실제로 예의 그 일침을 놓는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내 손은 거의 자동적으로 연필을 향한다. <이것에 밑줄을 그어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한쪽 귀퉁이에 《아주 훌륭하다!》라고 적고 느낌표를 힘주어 찍자. 그리고 앞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장엄하게 깨닫게 해준 저자에게 몇 마디 경의를 표할겸, 이 글이 네 안에서 불러일으킨 생각의 흐름을 요점만 기록해두자.>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자신이었다. 내가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나는 아름다운 작은 책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얻어맞은 사람처럼, 실컷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슬그머니 서가로 돌아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 잊힌 채 꽂혀 있는 수없이 많은 책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김인순 옮김, 『깊이에의 강요』, 「문학의 건망증」, 열린책들(2020, 신판), p.6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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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부분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독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심지어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재밌을 것 같다며, 내 책을 살 때 한 권 더 사서 준에게 주기까지 했다. "우리 이거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자. 신난다!" 하면서.
답답한 마음에 준에게 문학의 건망증이 도진 것에 대해 비탄을 토로했다. 그는 뇌로 가지 못한 무언가가 몸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있을 거라고 괜찮다 말했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읽었던 책을 기억하지 못하고, 한참을 읽고서 알아차리는 것은 언젠가 약속한 낯선 사람과의 저녁 식사를 떠올리게 한다.
즉흥적인 만남을 좋아하는 편인데, 일이 바빠지면서 대체로 만남을 미리미리 약속해야 한다. (여전히 가끔 취소된 업무 사이 갑작스러운 일정을 잡는 것을 좋아한다) 때때로 어떤 만남은 설렘보다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데, 기준을 알기 어렵지만, 상대가 낯선 사람의 범주 속에 있는 경우가 대체적이다. 그럴 때면 천재지변으로 약속이 취소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 사람이 싫거나 안 좋은 일로 만나는 상황이 아닌데도 그런 마음이 될 때가 있다.
그런 낯선 사람과 일찌감치 해둔 약속을 지키러 간 저녁.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하고 앉아, 식사를 하며 딱딱한 분위기를 느슨하게 풀어주려 간단한 반주를 곁들이고, 이 말 저 말 주고받기 시작한다. 일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어쩐지 대화가 잘 통해 이야기는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고, 식사 자리가 끝날 즈음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상체가 테이블 중앙을 향해 기울어 있다.
"한 잔 더 할까요?" "좋죠-"
근처 음악이 좋은 자그마한 바에서 각자 좋아하는 술을 시킨다. 대화를 지속하기엔 스트레이트 보다 온더락이 좋을 것이다. 잔을 빙글 돌리며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요." "그게 그러니까…" 흐르는 대화의 끝자락, 우리는 유년 시절까지 되짚고 있었다. 언젠가 누구 한 사람이 먼저 시큰해진 콧등을 매만지니, 맞은 편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약속의 날이 다가올 때 느꼈던 무거움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가까워진 기분이 된다. 바에서 나와 코트 깃을 여미며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조심히 들어가요." 말하고 두 사람의 등은 멀어진다. 그래서 그를 다시 보았냐고 물으면 보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다. 어떠한 의도 없이, 좋은 하루를 보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것이다.
오늘과 내일이, 겨울과 봄, 그리고 한 해가 내 시계 초침에 맞춰 한 칸 한 칸 넘어간다.
커다란 사거리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 맞은 편. 익숙한 얼굴이 있다. '누구더라..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모든 신호등, 초록불을 켜고 사람들이 서로를 가로질러 건너고 엉킬 때, 그 옆을 지나며 '분명히 봤어. 어디서? 언제?' 머릿속 해마에게 정신 차리라고 기억해내라고 2-30분 사정하고 작업실에 도착해서 의자에 앉았을 때. <아!> 큰 소리 내어 몇 해 전 그 바를 떠올린다. '그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었던, 그래 분명 그랬지.' '그런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다고 했지?' 하고는 밀려오는 허무. 그를 만나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그날의 온도와 좁혀졌던 거리감은 아련하게 남아있지만, 정작 우리가 나눈 수많은 이야기는 어떤 부분도 섬세하게, 아니 사실 두루뭉술하게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문학의 건망증」은 그렇게 언젠가 약속한 낯선 사람과의 저녁 식사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읽어서 무얼 하나'로 시작했지만, '"어차피 죽을 거 살아서 뭐 하나." 그럴 수는 없는 거니까'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쥐스킨트의 책 속에 이미 적힌 구절이었고, 그것 역시 기억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준의 이야기처럼 그래도 어딘가 체화되어 남아있는 것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얻어맞은 사람처럼, 실컷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슬그머니 서가로 돌아갔다. 오늘도 나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책을 읽으면서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읽으면서 자리에 앉고,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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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Diethelm, <Diethelm Antiqua>
Haas'sche Schriftgiesserei, Münchenstein, 1941-1955,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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